그렇다면 원장은 왜 금기서를 읽지 못하도록 하였을까? 금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희극론이었다. 언뜻 보기엔 희극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쉽게 유추해 내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원장은 어떤 이유로 희극론을 금기서로 하여 독을 발라둔 것일까? 영화의 후반부에서 윌리엄 수도사와 수도원 원장의 대화에 그 해답이 나와있다.
‘웃음이 왜 그리 두려운 겁니까?’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니까. 두려움이 없이는 신앙도 있을 수 없소.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느님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원장은 당시 기독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는 요소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웃음은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사들이 희극을 읽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성함'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금기서로 지정되었다. 원장은 죽는 마지막까지 책을 찢어먹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한다.
중세 교회세력은 성경을 자신들만이 읽을 수 있도록 하여 교회의 권위를 내세웠으며 신은 인간이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성스럽고 거룩하며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장미의 이름’의 수도원 원장과 수도사들도 이러한 길에 빠져있었다. 웃음은 천박한 행위이며 여자는 추악하고 여자와 접촉하는 것은 더러운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죄 없는 여인이 ‘악마 숭배의 도구들’인 검은 수탉과 검은 고양이와 함께 있다는 이유로 여인을 악마로 규정하고 화형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은 반전되어 ‘악마’라는 여인에게 화형을 선고한 베르나르도 귀는 죽게 되고 여인은 극적으로 구출된다.
이렇게 ‘장미의 이름’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마음대로 해석하고 만들며, 그것으로부터 잘못된 행동을 일삼고 그들의 잘못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중세 교회의 모순된 모습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논점이라고 보이는 '두려움과 공포'는 비단 중세 시대에만의 얘기가 아니다. '볼링 포 컬럼바인'이라는 미국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에서 주장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의 지배 계층 - 특히 총기 협회 - 에서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어서 총을 사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의도는 지속적인 총기 판매로 자신들이 경제적 이득을 보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선 집 근처 마트에서 아무 문제없이 총알을 살 수 있다.)
수세기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지배를 위한 '두려움과 공포'의 막은 언제 내릴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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